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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炎燒娜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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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00 반갑습니다, 백 선생님. 얼마 만에 연락하는지는 모르겠군요. 내가 음악가로 독립하고 나서.. 한. 오 년 만인가요. 그동안 편지 못 보낸 것은 죄송합니다. 쫓겨 사는 통에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군요. 아무튼. 각설하고. 오늘 제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염치 없는 부탁을 하나 하기 위함이요, 당신에게 나의 마지막 조각을 남기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선생님. 나는 일주일 뒤에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이것은 내가 이 세상에 환멸을 느낀 것 때문도, 더 이상 살아갈 의지가 있는 것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정녕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 이것의 답을 찾지 못한 탓이지요. 예에. 오 년 전, 서른 둘에 대학을 완전히 졸업한 이후. 나는 연주가로 살아가는 삶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음악은 타인들의 관심을..
No. 7 1/2 황홀경. 그 단어가 아니라면 절대 담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녀가 죽었음에도. 나는 그 곳에 앉아서.. 무언가에 홀린 듯 연주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광경은 너무나도 황홀해서.. 마치, 한 번 본 것 만으로도 눈 앞에 어른거리고. 눈도, 귀도, 머리도 모두 녹아내려 흐물흐물한 것으로 바뀔 것만 같은 그 광경은. 너무나도 황홀해서.. 감히. 나의 첼로로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였지요. 아아.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 황홀경은 내 머릿속에서 휘몰아쳐만 갑니다. 대들보가 무너지며 나는 소리는, 마음까지 찢어발기는 큰 북의 소리요, 와장창 줄지어 추락하는 기둥의 소리는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주는. 팀파니의 소리입니다. 문이 끼이익거리며 제 마음대로 열리는 소리는..
No. 7 친애하는 K 선생에게.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요즘은 날씨가 영 아니꼽지요. 무슨 소문이 도는 까닭에 찾아오는 어중이떠중이들도 많이 있고요. 바닷골을 떠난다는 말이 이해가 갈 만큼, 동네가 흉흉해졌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 곳을 떠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오늘 밤 나의 저택에서 열릴 연주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연주회. 세계적인 예술가 M이, 우리에게 신성한 충격을 안기어 준 M 교수가, 친히 이 바닷골에 돌아와 자신의 역작을 뽐낼 예정입니다. 만일 시간이 된다면 명이 살고 있는 그 별장으로 잠시 걸음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번 연주는 그 무엇보다도 새롭기 때문에, M과 오랫동안 함께하였던 당신에게 더욱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대학교 명예교수 백 선생 올림 --
No. 6 K 형님. 이상합니다. 황홀경이, 황홀경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아요. 그, 생명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아. 아무리 광염 같은 불꽃을 질러 대고, 온갖 방향으로 노력하여도 그것이 보이지 않아요. 아아, 형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제 A가 내 손끝에서 스러졌어요. 그런데. 작품 따위 나오지 않았어요. 허접하고 예술성 없는. 그런 음만이 악보 위에서 넘어질 뿐이었어요. 아아, 형님. 당신께 다 털어놓겠습니다. 백 선생이, 내게 가까운 이인 만큼. 내게 소위 '정서적'인 충격을 주는 이인 만큼. 내게 영감을 준다고 조언하길래. 그 아이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하였어요. 형님.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 모든 것인걸요. 그 아이를 보고 있자면, 친자식도 아닌 그 아이를 ..
No. 5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아버지께서 할아버지 몰래 보내고 오라고 해서 이것도 같이 넣었어요. 근데, 내 생각에는. 할아버지가 아버지 편지는 뺏어서 내 편지만 갈 것 같아요. 우리 할아버지는 왜 이러실까요? 아빠는 좋은 사람이고, 할아버지도 착한 사람인데. 둘이 만나면 매일 싸우기만 해요. 밥 먹을 때면 아무 말도 안 하고요, 둘 다 첼로 연주도 안 해요. 나는 할아버지랑 아버지 첼로 좋은데. 아. 그러고 보니까. 나 할아버지랑 아버지 싸우는 거 본 적 있어요. 잠 안 와서 같이 자려고 안방 갔는데, 서로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새 작품이 어쩌고, 신참성이 어쩌고 하면서 서로 소리를 지르다가요. 갑자기 내 이름이 나오는 거에요. 할아버지가 나보고 손자라고 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친자라고 ..
No. 4 잘 지내고 있는가, K 선생? 나일세. 백. 아마 이 편지가 올 때 즈음이면.. 자네도 명의 음악을 들어 보았겠지. 미인도 [迷姻圖]라고 하던가?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이야. 간신히 소나타 형식으로 분류를 해 놓았지만, 실은 형식도, 가식도, 하다못해 꾸밈도 하나 없는... 진정한 음악이지. 명이 그딴 여자한테 홀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터인데.. 참으로 안된 일이 아닐 수 없군. 아, 명은 걱정하지 말게나. 내 노력 덕분에 명은 잘 지내고 있어. 아내 대신 아들을 보고 살라고 하였지. 자네에게 쓴 편지에, 그 아이에게 그 여자가 겹쳐 보인다는 말이 있길래. 냉큼 잡아채어 명을 꾀어내었다네.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어차피, 나도 내 손자가 저딴 수동적이고 예민하기만 한 녀석 ..
No. 3 오랜만입니다. K 형님. 이렇게 깔끔한 편지지에 멀끔한 펜으로 글씨를 적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군요. 허나, 이 깔끔하고 멋진 종이에. 새 펜으로 날아갈 듯한 글씨를 적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너무나도 무겁고 한스럽습니다. 예에. 이미 백 선생에게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마는.. 그녀가 죽었습니다. 다섯 살 난 아이와, 나를 놔두고. 몇 년 남짓한 한여름 밤의 꿈은, 그 무엇보다 달콤했고.. 그곳에서 깨어나 맞이하는.. 춥고 싸늘한 겨울은.. 헤쳐나갈 방법조차 보이지 않는군요. 아무리 이 바닷골이 '그러한' 쪽의 명소라고는 하지만, 어찌하여 이 곳에 온 지 오 년도 안 되어서 저들과 같은 길을 갈 수가 있었을까요. 타인들은 나를 불쌍한 자식이라 손가락질하고, 그녀는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았지만.. ..
No. 3 1/2 황홀경을 보았습니다. 아니. 들었다는 것이 맞겠지요. 형님은 의사니까 알고 계실 겁니다. 목 부근에서 펄떡거리는 그 활기찬 리듬이. 큰북처럼 울려퍼지는 생명의 박자가. 지휘하듯 흔들리는 손과 무엇에 심취한 듯 부릅뜬 눈을! 그 하나도 빠짐없이 내 모든 것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아아. 그렇게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음서도… 발버둥치며 지르는 소리는 성악과도 다름이 없고. 어떻게든 힘을 주어 저항하는 행동은 마치 도돌이표와 쉼표처럼 느껴져 오지요. 거기다, 그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내게 오지 않을 때 즈음…뚜욱뚜욱 흘러넘치는 것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율이 되어.. 내 악보 위에 그려졌습니다. 장담컨대, 내가 이것을 낼 수 있다면 -당연히, 그녀의 허락 하에서- 다시 음악가 광염이 되어서는.. 백을 뛰..
No. 2 K 형님. 잘 지내십니까? 결혼 후부터 그녀가 편지를 못 보내도록 막아서, 이런 것에나마 몰래 써서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짖궂은 면이 있다니까요. 뭐가 그렇게 질투가 나는지. 자신은 항상 안팎으로 놀러다님서.. 하여간. 늘 이렇게 뭐만 하면 헤어지자고 협박을 해 대는 통에 힘에 부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만, 저는 걱정하시는 것보다 잘 버티고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입니다. 그것이 아침이든 저녁이든 간에.. 그녀가 오면 우리는 커튼을 치고, 손바닥만한 햇빛을 가린 담에.. 같이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녀가 '나에게는' 이라고 운을 띄워 주면 '당신밖에 없다' 고 대답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지요. 가끔 청소..
No. 1 K 형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두어 달 뒤에 마을로 돌아와 히카와-형님께 말씀드린 그 하이얀 여자 말입니다-와 식을 올릴 예정이라,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유학 생활을 하던 도중에 왠 소리냐고 물으신다면,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사실은.. 그게.. 계획에도 없는 2세를 덜컥 가지게 되어서 말입니다. 분명 내 자식이 틀림없다고 그녀가 말했던 만큼.. 제가 그녀를 책임지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물론, 백 선생은 걱정 마시지요. 사전에 이야기를 다 마치었습니다. 급한 소식이라 급행으로 편지를 부치었는데.. 얼마 가지도 않아 바로 답장이 왔거든요. 그 겉멋만 잔뜩 든 늙은이가 화내는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나를 제대로 키워 주지도 않았으면서 도리가 어쩌고, 정이 어쩌고 하면서 칭..